유라시아 엔은 생각했다. 여태 몇백 년을 살아오면서 그 각기의 일 년 일 년이 남달랐던 적이 있었는지를. 고작 해야 몇십 년을 사는 유한한 생애의 단명종들이 느끼는 일 년의 체감과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일 년 단위로 바뀌는 해 같은 건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단명종들보다 조금 더 무한에 가까운 삶을 사는 종 특유의 무감함이었다. 애초부터 기억하는 시간의 단위도, 몸으로 느껴지는 시간의 감각도 간극이 컸다. 매일은 그저 매일의 해가 뜰 뿐. 일 년이라는 단위의 시작, 그 첫 해가 뜨는 감회는 반복되는 매일의 시작과 다르지 않았다. 조금 더 정확하게 짚자면 지루함에 가까울 것이었다. 어쩌면 시시함일지도 몰랐다. 그 일 년과 일 년이 쌓일수록 무감함은 견고해지기 마련이었다. 종종 억겁의 시간 속에 갇..

모든 세계의 리스 아이작은 죠니 죠스타, 너를 좋아하고 있다. 그 말에 죠니 죠스타의 손끝이 잠시간 머뭇거린 이유를 죠니 죠스타 스스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다른 세계의 리스 아이작을 데리고 오겠다는 그 협상에, 어째서 죠니 죠스타의 손끝은 물론이고 온몸의 말단이 다 저릿거렸는지…… 정말로 죠니 죠스타는 알 수 없었다. 모든 세계의 모든 리스 아이작을 데리고 온다고 한들 지금-여기, 바로 여기에서 죠니 죠스타와 함께한 리스 아이작이 될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을 죠니 죠스타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리스 아이작을 만나고 싶었으니까. 모든 세계의 리스 아이작이 죠니 죠스타와 친하다면, 지금-여기, 죠니 죠스타와 여러 겹의 감정을, 우정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작고 사랑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큰, 무어라 형..

○○ ■■?■■ 응.○○ 이 짓은 이제 더 **겠어.■■ 입으로는 모두 그렇게 말하지.○○ 우리 **지는 게 어떨까? 그게 나을지도 몰라.■■ 내일 *이나 매자. (사이) ?이 안 오면 말이야.○○ 온다면?■■ 그럼 사는 거지. ■■ 그럼 갈까?○○ 가자. 그러나 둘은 움직이지 않는다.1) ∞ 영영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지는 못해도 머리로는 알 수 있는 쪽과 언젠가는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기약 없는 기다림 중 어느 쪽이 더 나은지에 대해. 전자를 비관과 절망으로, 후자를 미약하게나마 희망으로 판단하는 것은 다소 비겁한 데가 있었다.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위안 삼을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명확히 있었다. 어느 쪽이든 그 존재를 존재자로서 마주할 수 없었다.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고 했던가. 든 자리..

어이, 에치젠. 모모시로 타케시는 대답이 없는 에치젠 료마를 의아한 얼굴을 한 채로 내려다보았다. 그래 봤자 누군가 정성껏 빚어 놓은 것 같은 둥그런 머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에치젠 료마가 모모시로 타케시의 품으로 파고들어 온몸을 기대어 안겨 있는 자세인 탓이었다. 부름에 고개를 가슴팍으로 더욱 파묻어 오는 것으로 보아 잠든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공연해진 부름이 머쓱하지는 않았지만 손을 올려 작게 비비적거리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교복을 갈아입지 않고 재킷만 벗어 두고 곧장 침대 위로 올라온 탓에 조금은 구김이 생긴 셔츠만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작게 내었다. 그래, 이런 사이. 방과 후 연습이 없는 때라면 서로의 집 중 어디에든 들어가 방에서 몰래 몸을 맞붙이는 사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제대로 가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