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타마 드림 히어로 모독

히어로 모독¹

ⓒ 영

 

이제 지쳤어. 그러니까 슬슬 나를 해치우지 그래.

 

그런 말을 하는 A의 안색에서는 어떤 피로도, 염증같이 눌어붙은 지겨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자리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심과 그에 동반될 수 있으리라고는 가늠하기도 힘든 초조한 내색이었다. 그 이질적인 정서들의 결합은 아무에게도 티가 나지 않았다.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사이타마에게조차도. 아니, 모두가 알아도 사이타마만은 끝내 몰라야 할. 이는 단순히 사이타마가 타인에게 무감하기 때문만은 아닐 테였다.

 

A는 숨을 가다듬으며 사위를 둘러보았다. 시야로 들어찰 수 있는 범주 내의 모든 전경이 깡그리 폐허였다. 원래의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찾으려야 찾을 수 없었다. 간판들이 한 줌의 잔해가 되어 발치에서 뒹굴고 있어도, 반파된 빌딩들이 그 뼈대가 되었던 철근을 무자비하게 드러내고 있어도, 자동차들이 우유갑이라도 되는 양 본래의 부피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형태로 찌그러져 있어도, 그런 것들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오히려 본보기로 적당하다는 소감 정도가 전부였다. 이를 A 본래의 무감함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모종의 책임 전가에 가까웠다.

 

인간이라는 종은 선한가, 악한가? 고대부터 이어져 온 이 물음은 기실 선문답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각각의 시대에서 어떤 답이 우세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A에게만큼은 천지가 개벽하는 일이 있다고 해도 변하지 않을 부동의 답이 확고했다. 인간은 악하다. 조금 더 적확한 답이 있다면, 인간은 응당 감사해야 할 일에 감사할 줄 모른다. 물에 빠진 사람을 기껏 구해 주었더니 봇짐을 내놓으라고 언성을 높이는 경우는 한두 번이 아니라 셀 수조차 없었다. 너무도 압도적이고 초월적인 힘을 보면 설령 그 힘이 자신을 구해 주는 데 쓰였다고 해도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부정부터 하고 보거나 괴인과 같은 취급을 하기도 했다. 사이타마를 대하는 시민들의 태도만 보아도 그것은 숨겨지지 않았다. 인간들은 스스로 구성한 인간성이라는 규격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면 그것의 쓰임보다도 그 존재함 자체에 두려움을 느꼈다. 경외도 못 됐다. 간혹 그저 운 같은 외적 상황으로만 그 덕을 돌리는 경우라면 차라리 나을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그 기저에 부정이 깔려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A가 사위를 둘러본 이유는 이에 연원했다. 자신이 폐허로 만든 도시의 전경을 확인하려는 움직임 따위가 아니었다. 민간인들은 전혀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피난시키라는 명령을 내린 이유. 그리하여 히어로들만 노리는 것처럼 보이도록 이 사태를 연출한 이유. 물론 여태 행해 왔던 히어로 물갈이의 일환으로 판단할 수도 있었으나 이 마지막 작전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안전지대에 대피해 있으면서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직접 그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저속한 욕망을 A는 잘 알았다. 안전지대로 대피한 이상 지금 벌어지는 이 모든 사태는 더는 그 자신의 일로 귀속되지 않았다. 이 사태와 자신을 분리시킨 채로 안전한 곳에서 오로지 이것을 삼인칭적 시선으로 목도하고만 싶어 하는 그 저열한 관음증의 욕망을 A는 기꺼이, 다분히 의도적으로 충족시켜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도리어 반드시 필요한 요소 중 하나기도 했다.

 

도시를 부수던 것보다 더 큰 위력으로 사이타마에게 맹렬한 공격을 퍼붓는 A는 자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배역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사이타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하게 A를 응시하기만 할 뿐이었다. A는 머릿속에서 뉴스에 실릴 헤드라인 문구를 짐작해 보았다. 전례 없던 악당 A를 가뿐히 무찌른 히어로, 대머리 망토! 그러기 위해서는 이 시나리오는 A의 예정대로 흘러가야 했다. 징그러울 정도로 다닥다닥 즐비한 관객들의 숨은 눈동자를 의식하며, 잘게 부수어진 도시의 잔해들을 도저히 수복은 꿈도 못 꿀 정도로 더더욱 잘게 부수며, 자칫하면 사이타마가 죽을지도 모를 공격을 수도 없이 가하며……. 물론 아무리 애를 써도 사이타마에게는 상처는커녕 흠집 하나 낼 수 없음을 A는 진작 알고 있었지만, 무릇 관객에게 보이는 퍼포먼스란 중요한 법이었다.

 

부서진 것들이 계속해서 부서지며 흙먼지가 자욱하게 끼어도 사이타마는 미동도 없이 A와 마주 본 그 자리에 선 채 A를 향해 붙박아 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시선과 마주할 때마다 A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자꾸만 목이 탔다. 사이타마는 아무것도 읽지 않는다. 그것이 설령 A의 이러한 기행일지라도, 사이타마는 A를 통해 A를 읽지 않는다. 그렇기에 A는 사이타마의 시선 속에서 그 어떠한 함의도 느낄 수 없었다. A에게도 사이타마의 자의적 판단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어서, 어서 그 손으로 나를 가뿐히, 제대로 해치워 주기를. 이 모든 것은 오로지 너를 위해 마련한 것들이니.

 

⚠ 재해 레벨 竜

 

부수는 행위는 A에게 그 어떤 일말의 감흥도 전해 주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A를 저지하려 여러 히어로들이 A 앞에 섰던 것도 같았다. 스스로 히어로를 자처하며 세간에서 히어로라고 칭송받는 그치들을 처리하는 일은 맥이 빠질 만큼 손쉬웠다. 역시 사이타마가 아닌 히어로는 필요 없는 게 맞잖아? 사이타마라면 손가락 하나로도 제압할 수 있는 규모의 힘을 그 어떤 히어로도 막지 못하는 것을 보며, A는 스스로 행해 왔던 히어로 물갈이의 모든 족적들이 옳음을 향해 있다고 확신했다. 사이타마만 있으면 해결하지 못할 사태가 없는데 어째서 사이타마가 아닌 작자들이 히어로 행세를 하며 사이타마보다 훨씬 칭송을 받지? 사이타마에게는 아무도 감사하지 않는데 사이타마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자들이 히어로랍시고 숱한 감사 인사와 더불어 인정을 받지? 고작 그 정도의 힘으로. 고작 그 정도의 능력 따위로. 이 세상에 히어로라는 것이 존재해야 한다면 그에 걸맞는 존재는 사이타마뿐이고, 히어로라는 타이틀은 오로지 사이타마만을 위해서 존재해야 해. 나머지는 그저 히어로 흉내를 내며 히어로인 척을 하고 그에 안주하기만 하는 가짜들. 사이타마가 아닌 히어로라면 한 트럭을 A의 앞에 데려다 놓아도 A는 그들을 늘 그래 왔던 것처럼 허무할 정도로 쉽게 처리할 수 있었고, 정말로 그랬다.

 

아마 마지막으로 대령된, 히어로 네임조차 알 가치 없는 얼뜨기 히어로를 채 몇 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금세 가사 상태로 추락시킨 A는 바닥으로 내뻗은 그 몸체의 등판 위로 발을 올렸다. 이 얼뜨기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희생 제물도 못 됐다. 가볍게 힘을 주어 그 위를 짓누르며 호통을 내질렀다.

 

당장 사이타마를 불러와.

 

그가 나타나지 않으면 이 도시는 파괴의 시작점이 될 테니까.

 

괴인으로 인한 재해가 아닌 전례 없던 이 인재人災는 벌인 자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성을 알 수 없었다. A의 입으로 공표한 것이라고는 히어로를 제외한 민간인들은 제대로 대피시킬 것, 그 하나뿐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불가해와 미지, 그 자체였다. 목적을 알 수 없기에 어떤 대응도 할 수 없는, 지극히 무력한 입장에만 놓이는……. 아무리 불가능해 보여도 가능하리라 여겨지는, 할 수 있는 일이 존재라도 한다면 인간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불나방처럼 달려들 수 있었다. 그렇기에 A는 그 명목상의 일말의 희망마저도 모조리 박탈시키기로 했다. 지금의 A는 괴인보다 더 괴인 같은 인재人災라는, 아주 우스운 명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앞다투어 이 기이한 재해를 실시간 뉴스로 송출해 내는 데 분주했다. 이 시나리오는 A에게만 쇼show인 것이 아니었다. A의 목적성과 의도를 몰라도 재해는 재해 자체로 일종의 쇼show가 되기에 충분했다. 안락한 소파에서 손가락만 몇 번 움직여 생생한 화질로 현장의 재해를 구경하는 사람들. 관객은 A가 사전에 대피시킨 현장의 시민들뿐만이 아니었다. A의 호통은 전파를 타고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굳은 표정으로 텔레비전 화면을 보고 있던 사이타마에게도.

 

그와 동시에 A는 괴인에게만 매겨지는 재해 레벨인 용竜급 재해로 격상되었다. 요란스럽게 텔레비전 화면으로 띄워지는 그 소식을 눈으로 훑으며 사이타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평소보다 경직된 얼굴에서는 크게 감정적 동요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선가 뒤틀리며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사이타마는 그 소리가 자신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는 사실을 알지는 못했다. 적어도 A를 마주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리고 지금.

 

A는 자신의 뜻대로 이 자리에서 사이타마와 대치 아닌 대치를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사이타마의 의중을 읽을 수는 없었다. 얼른 나를 무찌르지 않고 뭐 해? 너라면 나 정도는 동전을 뒤집는 것보다 쉽게 제압할 수 있잖아. 어째서 너에게 유효하지도 않을 내 공격들을 가만히 지켜보며 서 있기만 해? 사이타마가 A를 해치워야만 이 시나리오는 종장을 맞을 수 있었다. 사이타마를 극적으로 돋보이게 하기 위해 도시가 더는 도시라고 불릴 수 없을 만큼 부수었고, 지나가는 조연일 뿐인 히어로들을 무자비하게 처리했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종장에서는 사이타마에게 박수갈채를 기꺼이 선사할 관객들도 마련해 두었다. 사이타마의 독무대로는 손색이 없었다.

 

A가 무의미한 공격을 멈추자 자욱했던 흙먼지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모든 전경 속에서 사이타마의 얼굴만이 선명하게 들어찼다. 이제 지쳤어. 그러니까 슬슬 나를 해치우지 그래. A의 담담한 음성을 가장 가까이에서 들은 사이타마의 표정은 여전히 그 어떤 것도 읽을 수 없었다. 사이타마가 구태여 감추려고 감춘 것은 아니었다. A가 사이타마를 향해 턱짓을 까닥이자 사이타마는 기다렸다는 듯 발을 뻗어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을 망설임 없이 좁혀 나갔다. A는 간격이 좁아 드는 것을 보며 긴장감인지 기대감인지 모를 감정의 양단에 서서 고대했던 사이타마의 처분을 기다렸다. 악랄한 인재人災의 파멸이자 진정한 히어로의 영광스러운 피날레. 마치 이 순간만을 위해 살아온 것 같은 고양감이 전신을 휩쌌다. 사이타마, 나의 삶 속에서 나를 지운 지 오래되었어. 나의 삶에는 내가 필요 없다. 오로지 너를 위해 준비한 이 무대가 완성되기만을, 그러기만을 기다리며 나는 나의 삶의 A가 되었고, 그에 일말의 후회도 없다고…….

 

싫어. 그리고 너 제정신 아닌 것 같으니까 좀 자고 일어나서 마저 대화하자.

 

그 말을 끝으로 A의 시야는 캄캄하게 물들었다. 이마 위로 사이타마의 손가락이 묵직한 한 방을 날린 것도 같았다. 고작 엄지와 중지만으로, 이토록 쉽게……. 홧홧하고 뜨거운 열감이 꿈결처럼 느껴졌다.

 

재해 레벨 ⯑ ⯑ ⯑

 

한밤중이 다 되어서야 눈을 뜬 A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광경을 목도하자 도리어 혼몽해졌다. 낯익은 벽지와 조촐한 세간들은 사위를 더 둘러보지 않아도 이곳이 어디인지를 명확히 알려 주고 있었다. 옆에서 A를 주시하고 있는 시선은 도저히 모르는 척할 수 없을 만큼 그 존재감을 숨기지 않았다. 애초에 숨길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일어난 뒤 마저 대화하자던 그 고저도, 억양도 없던 음성이 귓전에 어룽지는 것도 같았다. 우리가 어떤 대화를 해야 하는지, 또 어떤 대화를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고개를 옆으로 틀어 보게 된 사이타마, 네 표정은 왜 또 그런지……. A가 상상했던 종장과는 모든 것이 사뭇 달랐다. 언뜻 보기에 사이타마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서운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고, 어쩐지 슬퍼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늘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감정들이 속속들이, 이토록 선명하게 닿아 오는 그 자체가 낯설어서 A는 몸을 감싸고 있는 이불을 손으로 꽉 쥘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한 건 전부 너를 위해서 한 거야. 왜 그걸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어?

 

…….

 

대체 이걸 왜 몰라주는 거야? 너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지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

 

그런 상처받았다는 표정 같은 거 하지 마…….

 

사이타마는 A의 말을 가만히 들으면서도 그 말에 쉬이 반문하거나 반론하지 않았다. 분명히 A가 깨어나면 해야 될 말들을 여러 번 정리하고 추려서 머릿속에 되뇌어 놓기까지 했는데 막상 A의 말을 들으니 그 어떤 것도 이해되는 것이 없었다. 이는 곧장 사이타마의 만면으로 드러났고, A는 그 기미가 드리우자마자 이불을 붙들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너를 위해서 한 일인데 어째서 너는 도리어 상처를 받는 거야? 내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 세상에 히어로다운 히어로는 너뿐인데 아무도 몰라주는 게 잘못 아니야? 그래서 내가 그걸 알게 해 준 것뿐인데, 어째서 너는…….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봐.

 

하아…… A.

 

말이 안 통하는 거라면 나 그냥 갈래.

 

A.

 

내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이해 못 할 거잖아?

 

이야기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앉아라.

 

손에서 이불을 내팽개치고 몸을 뉘이고 있던 자리에서 일어난 A를 올려다보게 된 사이타마는 흐트러짐 없는 시선으로 A를 응시했다. 히어로 물갈이 사건의 범인이 A였다는 사실, 한 도시를 폐허로 전락시키고 출동한 모든 히어로를 그 어떤 자비도 없이 무참히 처리한 것이 오로지 그러한 악당 A를 해치운 자신을 히어로다운 히어로로 인정받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 궁극적으로 그것만이 A가 생을 살아 내던 동력이었다는 사실 중 사이타마에게 가장 큰 금을 냈던 것은 어떤 사실이었을까. 사이타마 스스로도 자신이 어떤 것에 슬픔 엇비슷한 감정을 느꼈는지, 그래서 상처라도 받은 것처럼 자꾸만 이리저리 일렁이다 휘청거리고야 마는 A와 시선을 얽고야 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다시는 이런 뻑적지근한 감정 따위 느끼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평생을 모르고 살았던 감정. A가 아니라면 촉발되지 않았을 감정이 속에서 엉망으로 엉켜 차마 수챗구멍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고여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쩔 생각이었는데?

 

…….

 

네가 계획한 일들이 전부 성공한 채로 끝나면,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데?

 

그런 건…….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는 거냐?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로 사이타마를 내려다보던 A는 그에 대해 정말로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듯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사이타마는 명치끝에서부터 단단한 노염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간단하고 사소한 내기를 걸고 게임을 하던 때가, 답지 않게 자신의 머리를 만지며 장난을 치는 A를 보던 때가 속절없이 우수수 기억 속으로 쏟아져 내렸다. 일상 속에서도, 하물며 괴인을 마주치던 때에도 질기게 따라붙어 이제는 자신의 전부를 거느리고 있는 것만 같던 무료함과 지루함이 그 아귀에서 자신을 느슨하게 놓아주는 순간에는 A가 자리하고 있었다. 힘을 대가로 인간으로서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그랬는데, 그 중요한 무언가와 엇비슷한 것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어 놓은 A는 정작 그 힘만으로 사이타마를 저울에 올려 두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나는 이 사실에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A는 그 저울 위에 A의 존재 자체는 올려 두지도, 올려놓을 생각조차도 없었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통제 영역을 벗어나 멋대로 고삐를 풀고 날뛰는 감정은 간만이었다. 참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여겼건만 참을 수 없다는 감각이 목구멍 너머로 울컥거리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옆에 없더라도 너는 너 스스로 빛나는 히어로였으면 좋겠어.

 

뭐라고?

 

너만큼은 그럴 자격이 충분하고, 네가 아니면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잖아.

 

A.

 

사실 내가 옆에 있건 없건 너는 이미 빛나는 히어로니까. 이제는 세상도 그걸 알 거야.

 

네가 내 옆에서 사라지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어.

 

…….

 

당연하지 않나? 우리는 친구인데.

 

하지만 나는…….

 

그래, 네가 옆에 있건 없건 내 힘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지. 그런데 그게 네가 내 옆에 없어야 될 이유가 돼?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는 쉽사리 봉합되지 않았다. 사이타마의 입장도, A의 입장도 완고하기로는 서로에게 지지 않았다. 직선으로 그인 두 선분이 아무리 밀접한 곳에 있다고 하더라도 맞닿지 않으면 영영 평행할 뿐이었다. 선문답 같은 말들이 반복될수록 상처는 벌어지기 마련이었고, 그 여린 속살을 찌르지 않고 말하는 방법을 사이타마도, A도 알지 못했다. 모든 이해는 또 다른 편향된 오해일 따름이었다. 하물며 그 기만적인 이해조차 성립되지 않는 대화는 끝없는 굴레 속으로 두 사람을 가두고 눈과 귀를 가렸다. 상처 준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자꾸만 가슴팍 안쪽으로 생채기가 남았다. 이런 내가 너에게 무엇이 될 수 있는데? A가 이 말을 차마 사이타마에게 할 수 없듯, 너도 결국 이 시시하고도 압도적인 힘이 아니면 내 옆에 있을 생각조차 없어? 사이타마도 이 말을 차마 A에게 할 수 없었다. 가장 연약하고 취약한 말은 그렇기에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말아야 했다.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에마저도.

 

이쯤 그만하자, 이런 대화.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는 말만이 깊은 새벽을 갈랐다. 어디로 기울어지지도 못하는 각자의 등이 평행하게 자리를 지켰다. 연약해지고 취약해지는 방법만큼은 모르는 두 명분의 마음 같은 것이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終

 

¹페터 한트케, 『관객모독』 제목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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